일처일부제와 혼외정사: 무엇이 문제인가?

포유류의 3%만이 하나의 배우자와 짝짓기를 합니다. 나머지 97%의 포유류는 여러 개체의 배우자를 거느리거나 다수와의 짝짓기를 시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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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진화생물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수컷은 더 많은 대상에게 자신의 씨를 뿌려서 유전자를 퍼트리려고 하고 암컷은 더 건강하고 우월한 수컷의 유전자를 받아드려서 더 나은 후손을 남기려 합니다. 즉, 자기 종족의 번영과 육성, 번식에 유리한 방향으로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포유류는 일부일처를 따르지 않습니다.

인간 역시 포유류에 속합니다. 배우자를 맞이하고 유지하는 기준 역시 진화생물학적인 해석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좀 더 나은 외모, 힘, 권력, 자산, 집안, 지능을 따지거나 좀 더 많은 배우자를 원합니다. 이는 과거의 생활상이나 현재도 남아있는 중혼의 흔적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대부분의 나라들에서는 사회적 규율로써 일처일부제를 통해 약육강식 논리에 의한 번영과 번식을 제한합니다.

문제는, 이 사회적 규제와 제한이 과연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것인가에 대한 고찰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대부분의 동물과 다르게 한정된 발정기가 없습니다. 언제든지 성적으로 흥분할 수 있고 언제든지 성적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에게 있어 섹스는 단순히 번식의 수단이 아니라 성적 유희의 수단으로서 큰 의미를 가지며 이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로서 분류됩니다.

섹스는 단순히 성적 욕구와 쾌락만을 충족시키는 수단이 아니라 깊고 강력한 신체적 접촉을 통한 나와 다른 타인과의 정서적 유대감을 끌어올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오르가즘과 정서적 유대에 깊은 관여를 하는 내분비물질인 옥시토신은 타인에 의한 신체적인 접촉을 통해 페르몬의 형태로 체외로 방출되기도 합니다. 이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어 유대감을 끌어올립니다. 성적 흥분을 통한 체내의 옥시토신 수치가 올라가고, 또, 신체적 접촉을 통한 체외의 옥시토신에도 영향을 받는 것이 섹스입니다. 만족스러운 섹스를 하고 나서 당사자들이 급격히 가까워지는 이유이죠. 이에 대한 반증으로, 옥시토신이나 바소프레신의 수치가 낮거나 올라가지 않는 사람이나 동물은 섹스를 해도 개체간 유대감이 형성되지 않거나 교감 능력이 상당히 떨어집니다.

일부일처라는 결혼 제도를 통해 자신의 번영에 제한을 거는 것은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줄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인류학자들은 말합니다.

일처다부제 혹은 일부다처제의 경우 우월한 개체가 다수의 배우자를 거느릴 수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능력이 뒤쳐지는 사람은 배우자를 가질 기회를 아예 박탈 당할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일부일처제가 그렇지 않은 제도에 비해 행정 및 정책적으로 사회를 유지하기에 유리한 점들이 많습니다. 그렇기에 결론적으로는 많은 사회에서 일부일처제를 사회를 유지하는 기본적인 제도 중 하나로 채택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봐야합니다. 일부일처라는 결혼제도가 과연 개개인 모두에게 합당하고 공정한 것인가?

일부일처제를 유지하기 위해 이를 채택한 사회에서는 이를 정당화하는 윤리관이나 교육을 주입합니다.

어린 아이들 중에는 이런 말을 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나는 너도 좋아하고 너도 좋아해. 우리 크면 다 같이 살자”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솔직한 자신의 감정에서 우러나온 말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커가면서 접하는 교육과 윤리관에 의해 어렸을 때 했던 발언이 사실은 이루어져서는 안된다는 관념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것이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해볼 여지는 없을까요?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남길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일부일처제를 받아들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일부일처제는 한 개인의 섹슈얼리티마저 제한하게 됩니다.

현대 과학의 발전과 함께 피임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임신이라는 속박에서 인류는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안 그래도 인간은 성적 유희의 존재인데 자유 의지에 따라 피임도 자유롭게 할 수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인간 섹슈얼리티의 르네상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개개인에 따라 본인이 추구하는 섹슈얼리티의 정체는 다양할 것입니다. 단 하나의 반려자를 추구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불특정 다수와의 캐쥬얼 섹스를 추구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만큼의 다양한 섹슈얼리티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기본적인 욕구이자 권리를 강압적으로 제한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단, 나의 섹슈얼리티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말이죠.

일부일처제를 유지하기 위한 많은 윤리관에서는 그 이유가 어떻든 반려자 이외의 사람과의 섹스를 일괄적으로 불륜이라고 치부하며 부정적으로 대해왔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혼외정사와 불륜을 구분하지 못한 채 무조건적으로 비난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러 불협화음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불협화음은 없어질 수 없는 것일까요?


연인이나 부부처럼 가까운 사이일수록 상호간의 섹슈얼리티는 존중되어야 합니다.

출처: psychologytoday.com

내 자신의 섹슈얼리티도 스스로 존중할 수 있어야하고 상대방의 섹슈얼리티도 존중할 수 있어야하죠. 이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결국 섹스를 다시 음지로 들어가게 되고 서로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은 채 살아가다가 상대방을 속이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이것이 흔히 일어나는 불륜이며 상대방을 속였다는 행위가 발각되면서 상호간의 신뢰가 깨지고 정서적 관계가 무너지게 됩니다.

부부나 연인이 합의하에 함께 활동하는 다자간섹스나 폴리아모리 혹은 제3자가 개입하는 섹슈얼리티는 상호간 섹슈얼리티가 존중되었을 때 가능한 행동의 한 예시로 보실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섹스를 스스로 존중하고 상대방의 섹스 역시 존중할 때 비로소 건강한 관계가 존속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미 사회화가 된 상황에서 해당 사회를 유지하는 기본적인 제도를 거부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과 반려자의 섹슈얼리티를 존중하는 일은 누구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열고 소통과 교감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무비판적인 제도의 답습과 맹목적인 비난보다는 열린 존중과 상호 합의를 통한 행복 추구를 이루는 것이 더 건강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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